CEO 탐구 - 박재홍 영무건설 회장·대한주택건설協회장

협력업체들과 끝까지 동고동락하는 '의리 경영'

긍정의 힘이 가져다준 선물
막노동서 시작해 종합건설사 일궈
압도적 지지로 협회장에 당선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출근을 앞둔 박재홍 영무건설 회장(64)은 거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웃는 연습을 하기 위해서였다. 2008년 닥친 글로벌 금융위기로 경제가 곤두박질하던 무렵이었다. 주거래 은행 직원은 수시로 회사를 찾아 동태를 살폈다. 재무상황은 말할 것도 없고 대표의 표정과 사무실 분위기까지 따져 ‘살생부’를 작성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대출 연장을 해줄 것이냐를 좌우하는 ‘저승사자’나 다름없었다. 박 회장은 “은행에서 언제 방문할지 몰라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었다”며 “혹여 얼굴이 어두우면 대출을 연장해주지 않을 것 같아 두려운 나날이었다”고 말했다.



억지로 웃는 낯을 띠어도 속은 타들어갔다. 어렵사리 대출을 연장했지만 돌아오는 어음이 문제였다. 체질적으로 술도 잘 마시지 못하는 그를 후배가 어디론가 잡아끌고 갔다. 회사에서 멀지 않은 광주 시내의 노래 교실이었다. “주로 ‘뽕짝(트로트)’을 불렀는데 아무 생각 없이 두세 시간 노래를 부르니 걱정도 사라지고 즐거웠다”며 “이때부터 노래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고 말했다. 박 회장에게 ‘노래하는 CEO(최고경영자)’라는 애칭이 붙게 된 계기다.



노래가 준 선물은 즐거움뿐만이 아니었다. 박 회장은 “노래 교실을 다니면서 표정이 한결 밝아지더니 신기하게 그 무렵부터 관급공사 수주를 따내기 시작했다”며 “긍정적이고 즐거운 마음을 가지면 일이 더 잘 풀려나간다는 확신을 얻었다”며 웃었다. 그는 어려움을 겪는 지인들을 만날 때면 “항상 웃으라”고 조언한다.


“웃으면 복이 온다”…스마일 경영
영무건설은 아파트 브랜드 ‘예다음(藝茶音)’을 사용하는 중견 주택업체다. 광주에서 시작해 지금은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호반건설 우미건설 중흥건설 등과 더불어 광주 출신 건설회사의 선두주자로 꼽힌다.


박 회장이 건설업에 들어선 건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다. 6형제 중 맏형인 그는 동생들의 학비를 보태기 위해 고교 1학년 때부터 수시로 광주 시내 건축현장에서 일했다. 5년제 실업계 학교였던 ‘조선대 병설 공업고등전문학교’에 다닐 때였다. 학비를 내기 어려워 그마저도 중퇴한 뒤 군에 입대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중동 건설 붐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 서민들에게 중동은 밑천을 잡을 수 있는 꿈의 땅이었다. 중동 근로자들의 연봉은 평균 650만원 선. 웬만한 집 한 채 값이 400만원 정도 할 때다. 군 복무를 마치고 나서 박 회장도 고등학교 때 전공(기계과)을 살려 사우디아라비아 서쪽 얀부의 가스터미널 공사 현장으로 파견을 나갔다. 기계 제어 장비를 설치하는 업무였다.


2년간의 중동 생활을 마치고 1983년 한국에 돌아온 뒤 그는 다시 건설현장에 나갔다. 박 회장이 중동에서 부친 돈을 모아 선친이 투자해놓은 90가구 규모의 작은 아파트 공사장에서 현장소장으로 일했다.


늘 남의 집에 얹혀살던 그에게 아파트 개발 현장은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온돌에 금이 간 낡은 셋집에선 연탄가스가 새는 일이 잦았다. 환기를 위해 6형제가 밤새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야 했을 정도다. 박 회장은 “서러운 셋집살이를 벗어나 번듯한 내 집 하나 마련하는 일이 너무 간절했던 시절”이라며 “현장소장으로 일하면서 아파트를 짓는 과정에 무척 흥미를 느꼈다”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아파트 개발사업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찾아왔다. 형을 도와 건설회사를 경영하던 고향 친구를 통해서다. 이 회사가 훗날 동양건설산업을 인수한 라인건설이다. 라인건설에 들어간 1986년부터 박 회장은 현장소장에서 시작해 관리상무, 총괄본부장 등을 역임하며 2만 가구의 아파트 개발을 진행했다. 땅을 사는 과정부터 아파트 분양까지 모든 실무를 두루 꿴 그는 영무건설을 창업해 독립했다. 영무건설은 아파트는 물론 호텔·리조트 개발, 도로 등 관급공사까지 하는 종합건설사로 성장했다. 지금까지 ‘영무예다음’이란 브랜드로 지은 아파트만 2만 가구에 이른다

신뢰·의리 중시…“협력업체 안 바꿔”
영무건설에는 독특한 관행이 하나 있다. 본사 직원들은 점심을 먹고 난 뒤 인근 도서관에서 한 시간씩 책을 읽어야 한다.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야 자기계발은 물론 업무에도 도움이 된다는 박 회장의 지론에 따른 것이다.


한번 인연을 맺은 협력업체와 끝까지 가는 끈끈한 관계도 별난 전통이다. 다른 협력업체들은 들어올 꿈도 꾸지 못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에는 남다른 사연이 있다. 영무건설의 첫 아파트 개발 데뷔작은 2000년대 초반 광주에서 분양에 나선 149가구 규모의 작은 단지였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인지도가 낮은 영무건설의 아파트를 소비자들은 외면했다. 두 차례에 걸친 100~200가구 규모의 후속 현장도 모두 저조한 분양실적을 기록했다. 당장 협력사들에 지급할 공사대금이 문제였다. 박 회장은 “공사대금은 완공된 아파트를 대물(代物)로 지급할 테니 일단 공사를 마쳐달라”고 호소했다. 사실상 ‘외상공사’를 해달라는 요구였다.


라인건설 시절부터 관계를 맺었던 협력업체들은 숙고 끝에 박 회장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한 전기설비 업체는 흔쾌히 16가구를 떠안기도 했다. 박 회장은 “협력업체들이 ‘박재홍이가 돈을 떼어먹을 사람은 아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며 “당시 절박한 사정을 이해해준 업체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고 했다. 창업 초기 험난한 고비를 넘긴 박 회장이 협력업체들과의 ‘의리’를 가장 중시하는 이유다.


그는 협력업체 대표들과 매달 산에 오르고 2년에 한 번 해외여행을 함께 다니면서 관계를 돈독히 한다. 박 회장은 “모든 산업이 그렇듯 사실상 대부분의 일은 협력업체가 한다”며 “이들과 신뢰를 쌓고 소통하는 일이야말로 기업 경영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12월 치러진 대한주택건설협회 회장 경선에서도 박 회장은 7700여 개사 회원을 향해 ‘소통강화’와 ‘단결’을 내걸었다. 진심 어린 호소가 통한 덕일까. 박 회장은 예상을 뒤엎고 큰 표 차로 당선됐다.


박 회장은 2005년 아예 노래 교실 회원들과 밴드를 결성했다. 이름하여 ‘CM 밴드’. 건설(construction)과 음악(music)을 합친 말이다. CM 밴드는 노인과 장애인 등을 찾아다니며 무료 공연을 펼치고 있다. 박 회장의 애창곡은 윤수일의 ‘터미널’과 오승근의 ‘내 나이가 어때서’다. 박 회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위기감이 커지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기본기에 충실하면서도 더 웃고 노래해야 할 때”라고 당부했다.

■ 박재홍 영무건설 회장
△1956년 전남 영광 출생
△2003년 영무건설 대표이사
△2013년 대한주택건설협회 중앙회 비상근 감사
△2016년 대한주택건설협회 광주·전남도회 회장
△2019년 대한주택건설협회 회장

이정선/구민기 기자 leeway@hankyung.com